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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인물에 대해 궁금하시군요. 그의 정치 여정과 업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회창은 정책과 비전은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와 경력은 한국 정치발전과 변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논란과 긍정, 부정 등 다양한 평가를 가지고 있는 이회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회창 프로필
이회창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법조인에서 시작해 정치계에 입문하여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입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후 판사로 임관하며 법조계에서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이후 헌법재판소 재판관, 대법관을 역임하며 법조계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에 뛰어들었습니다.
전 국회의원전 국무총리
출생: 1935년 6월 2일, 북한 서흥
학력: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캠퍼스 법학대학원
경력: 2010.03.~2011.05. 자유선진당 대표
수상: 1998. 미국 버클리대 특별명예상
근황
이회창은 정치 은퇴 이후에도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후배 정치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들의 정치 여정을 돕고 있습니다.
주로 강연 활동과 저술 활동을 통해 자신의 견해와 경험을 나누고 있으며, 여러 사회단체에서 자문 역할을 맡아 사회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회창 전 총재가 마지막으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건 2017년 유승민 전 의원이 대선 출정식에서 입니다. 유승민 의원은 이회창 총재의 핵심 참모였기 때문에 당시 이회창 총재가 정치를 개재하려는 것 아니냐는 궁금증도 있었지만, 그는 "인간적인 관계로 한 번 나왔다. 다시 칩거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2017년 이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최근 2024년 6월 정연욱 국민의힘 의원이 페이북에 사진 한장을 올리면서 이회창 전 총재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으로 그의 근황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회창 전 총재는 환하게 웃으면서 과거 파장만장한 한 시대의 정치인에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회창 회고록 '나의 삶 나의 신념' 과 '정치인의 길' 이라는 2권을 마지막으로 저술하였으며, 이외 아름다운 원칙, 법과 정의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나이
이회창은 1935년 6월 2일 생으로, 2024년 현재 89세입니다. 그의 정치적 여정과 사회적 활동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대통령 도전
이회창은 여러차례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습니다.
1997년과 2002년 대선에 출마했으나 아쉽게도 당선되지 못했습니다.
2007년 대선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였고, 2012년 박근혜 대통령 당선을 도운 이후 사실상 정계은퇴를 하였습니다.
특히 1997년 대선에서는 김대중 후보와의 치열한 접전 끝에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였습니다.
그의 정책과 비전은 당시 많은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지금도 그의 정치적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경력
이회창의 경력은 다양합니다.
법조인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헌법재판소 재판관과 대법관을 역임했으며, 이후 정계에 입문하여 국무총리와 한나라당 대표를 지냈습니다.
그의 정치적 활동은 주로 경제 성장과 법치주의 강화에 중점을 두었으며, 국민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들
이회창은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아들 모두 병역 면제 판정을 받아 당시 큰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논란은 그의 정치 경력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그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문제에 대해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정치적 책임을 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고향
이회창의 고향은 평안남도 평양입니다.
그는 한국전쟁 중 가족과 함께 남한으로 피난 와서 서울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고향은 현재 북한에 속해 있지만, 그는 남한에서 성공적인 삶을 이끌며 자신의 뿌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인
이회창의 부인은 한인옥 여사입니다.
그녀는 남편의 정치적 여정 내내 곁에서 큰 힘이 되어주었으며, 다양한 사회 활동을 통해 자신만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한인옥 여사는 이회창의 정치 활동을 적극 지원하며 가정과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사주
이회창의 사주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의 사주는 강한 지도자적 성향을 나타내며, 이는 그의 정치적 여정과도 잘 맞아떨어집니다.
그는 자신의 사주를 바탕으로 정치적 비전과 목표를 설정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총풍 사건
이회창은 총풍 사건으로 인해 큰 정치적 시련을 겪었습니다.
이 사건은 1997년 대선 당시 북한과의 연루 의혹으로 큰 논란이 되었으며, 그의 정치 경력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정치적 책임을 지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1997년, 대한민국은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뜨거운 열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당시 유력 후보였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측은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은밀하고 위험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바로 북한의 무력 도발을 유도하여 안보 위기를 조성하고, 이를 통해 보수층의 결집을 노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계획의 중심에는 청와대 행정관 오정은과 사업가 한성기, 장석중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박충 참사관과 접촉하여 휴전선 인근에서 무력시위를 해줄 것을 은밀히 요청했습니다. 마치 한 편의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하는 이 사건은 '총풍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총풍 사건은 언론에 폭로되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선거를 불과 몇 달 앞둔 시점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정치권을 뒤흔들었고,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검찰은 즉각 수사에 착수했고, 오정은, 한성기, 장석중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습니다.
총풍 사건은 단순한 정치 공작을 넘어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심각한 사안이었습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 국가의 안위를 담보로 삼은 이들의 행태는 국민들의 공분을 샀습니다. 이 사건은 선거의 공정성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는 중대한 범죄였으며, 대한민국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습니다.
총풍 사건은 비록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권력을 향한 욕망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그리고 국가 안보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는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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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이인제와의 관계
15대 대선 당시 이인제 전 장관은 최연소 노동부 장관을 거쳐 민선 초대 경기도지사에 당선되며 주목받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이회창 전 총리도 마찬가지로 주목받던 인물이었죠. 대선 이전까지 두 사람은 같은 당 소속으로 교류가 있었으나, 15대 대선 과정에서 경쟁 관계로 변하며 서로를 비난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대선에서 낙선하며 상처만 남은 싸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이인제 전 장관은 '피닉제'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성공적인 정치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5년 후, 16대 대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경선에 참여해 초기에는 높은 지지율을 보이며 한나라당 경선을 통과한 이회창 전 총리와 재대결이 성사될 뻔했습니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의 강력한 지지세를 이기지 못해 경선에서 탈락하게 되었죠. 이후 자민련으로 이동한 이인제 전 장관은 이회창 전 총리를 지지했지만, 이회창 전 총리 역시 낙선하였습니다.
다시 5년이 지나 17대 대선에서 이인제 전 장관은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충청도를 기반으로 10% 이상의 지지율을 보였으나, 이회창 전 총리가 출마하면서 지지율이 급락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회창 전 총리는 15.1%의 득표율을 기록한 반면, 이인제 전 장관은 0.7%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후 무소속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이인제 전 장관은 19대 총선을 앞두고 이회창 전 총리가 이끄는 자유선진당에 입당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두 사람의 관계는 개선되었고, 14년 만에 다시 동지가 되었습니다.
이인제 전 장관은 총선에서 당선되어 국회 생활을 이어갔고, 이후 선진통일당 대표로도 활동하였습니다.
이회창 전 총리는 박근혜 대선 후보를 지지하며 새누리당으로 돌아갔고, 이인제 전 장관 역시 이끄는 당을 새누리당과 합당하여 같은 당에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차이점은 이인제 전 장관은 정계 활동을 이어갔지만, 이회창 전 총리는 은퇴하여 평당원으로 지내게 된 것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악연과 인연을 반복하며 이어졌습니다.
1997년 여당 신한국당에서 민주계의 대표주자로서 대선 후보로 활동하던 이회창 전 총리는 2017년 유승민 지지를 선언하며 바른정당으로 옮겼고, 이인제 전 장관은 자유한국당에서 대권주자로 활동하다 경선에서 탈락하였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정계에서 점차 잊혀지게 되었죠.
이회창 전 총리는 2012년 정계 은퇴를 하였고, 이인제 전 장관 역시 2018년 충남도지사 낙선과 2020년 논산시·계룡시·금산군 경선 탈락 후 정계를 은퇴하였습니다.
이회창 전 총재의 정계 은퇴 마지막 인터뷰 이면서
회고록 출간 간담회 영상입니다.